지금은 어떻게들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대학교에 다니면서 개발 분야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쯤에 SI 회사에 대해서 들은 가장 극단적인 표현이 "IT의 3D"였습니다. 일의 특성상 힘들고, 야근도 많은데 연봉도 낮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사용했겠죠. 그리고 직접 SI 중소기업에 6년 정도 일을 했던 입장에서 그 표현이 과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인력은 없으니 기존 인력으로 돌려 막는 게 일상입니다. 그러다 보니 해보지 않았고, 담당자도 아닌 일을 맡게 되는 경우가 많았고, 신입이 사수도 없이 일을 해야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사람을 더 힘들게 하는 점은 SI 개발 회사의 특성상 타사에 가서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파견, 유지보수, 장애 대응과 같은 용어로 이런 일들을 표현할 수 있겠네요.
http://www.podbbang.com/ch/1780825?e=24194166
타사에 가서 일을 하는 행위가 SI 개발 분야에만 있는 건 아닙니다. 외국으로 출장을가는 경우도 있고, 취업한 회사보다 고객사에서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그러므로 SI 업계에서의 파견 형태의 일이 절대적으로 힘들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아는 사람들이 "IT의 3D"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분명히 있습니다.
항상 새로운 장애
파견을 나가서 한 번도 만나지 않았고, 일이 아니면 만나지 않을 타사 사람들과 일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절대다수의 타사 사람들이 있는 곳에 나 혼자 혹은 소수로 가서 그들과 일을 한다는 점... 그리고 다뤄야 할 이슈가 예측할 수 없고, 항상 다른 내용의 문제인데 내 회사의 일이라는 점입니다. 분명 내가 속한 회사에서 제공하는 서비스와 관련된 문제인데 그 회사의 직원인 내가 바로바로 처리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여기에 그 일을 해결해야 하는 사람이 경력도 얼마 안 되는 나 혼자라면?
파견이라는 것은 내가 속한 회사를 대표해서 타사에 가는 겁니다. 그러므로 타사 사람들은 내가 속한 회사와 관련된 일은 무조건 나를 통할 수밖에 없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바로 해결해주지 못하면 그때부터 절대다수의 타사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절대 소수의 죄인이 됩니다. 운이 좋아서 그런 상황에서도 나를 배려해주고, 이해해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저와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하소연하고, 퇴사하는 거겠죠.
내가 속한 회사의 일인데 왜 그 회사의 직원인 내가 그 일을 바로 해결할 수 없는 걸까? 이유는 많습니다.
1. 신입의 입장에서 아직 알지 못하는 일인 경우
2. 신입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내가 해보지 않았던 일을 어느 날 갑자기 맡아야하는 경우
3. 일의 특성상 타사와 복잡하게 엮여 있는 일인 경우
4. 실제로는 내가 속한 회사의 문제가 아닌 경우
괜히 "통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겠습니까? 무엇을 통합하겠습니까? 서로 다르고, 따로 존재하고 있고, 별개의 것을 내가 속한 SI 회사의 서비스 혹은 솔루션으로 하나로 합쳐주겠다!, 고객사인 너희가 신경 써야 되는 걸 우리가 대신 처리해서 너희는 너희가 해야 되는 일에 더 집중하게 해 주겠다는 겁니다.
즉, SI 개발 회사가 돈을 주고 파는 서비스/솔루션은 여러 개의 것들 사이에서 중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서로 다르고, 적지 않은 돈과 관련된 여러 개의 일들 사이에 "낀" 위치에 있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별의별 상황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중에는 내 잘못이 아닌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솔직히 모든 문제가 내가 속한 회사의 서비스/솔루션에서만 발생하면 훨씬 수월하게 원인을 파악하고,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나는 본 적도 없고, 일해 본 적도 없는 타사의 업무/시스템/환경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보니까 내가 담당하고 있지 않은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리고 실제 그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타사 사람들은 일단 중간에 낀 나한테 먼저 책임을 넘기는 겁니다.
한 조직에서 연차가 쌓이고, 연륜이 높을 때의 장점은 많은 경험을 통해 여러 상황의 원인이나 과정 등을 더 빨리 인지하거나 파악할 수 있고, 심지어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SI 회사에서 일을 하다 보면 아무리 연차가 오래 되었어도 겪어 보지 않은 일들이 많이 발생하고, 고객사마다 요구하는 것도 모두 다르기 때문에 기존에 하던 일을 그대로 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거에서 새로운 것이 추가되거나 변형이 되니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상황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아질 겁니다. 하물며 이런 상황은 경력이 있는 개발자들도 힘들어하는데 그보다 연차가 낮은, 특히나 신입 개발자에게는 거의 절망에 가까운 일이 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혼자 맡게 되는 경우가 많고, 그런 문제를 해결하거나 그런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혼자 타사로 파견되는 경우도 많은 겁니다.
타사에서 자사로...
적지에 버려지듯이 혼자 파견을 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일을 해결하고, 결과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파견 근무가 항상 힘이 든 것도 아니고요. 어쨌든 타사에 가서 일을 하고, 그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일을 잘 해결하면 나는 그만큼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인정을 내가 다니는 회사 뿐만 아니라 타사에서도 한다는 겁니다. 타사 사람이라고 해도 내가 속한 회사의 사람들보다 더 자주 만나고,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면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짧지 않은 시간을 그렇게 보내며 내 역할을 해내면 너무나도 당연히 이직 제안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 입장에서는 더 좋은 조건으로 더 큰 회사로 이직을 하게 되는 겁니다. 게다가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는 연봉도 적고, 일도 많고,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너무 고생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니 이직 제안은 거의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입니다. 단지 기존 회사와의 관계가 껄끄러워지고, 그 이직하는 과정이 복잡할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 이직하는 사람들이 절대다수이고, 이직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주변에서 왜 가지 않냐고 바보 취급을 할 정도입니다.
이직 자체는 절대 잘못된 게 아닙니다. 이직을 통해 내 가치를 올릴 수 있으니 당연히 해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IT의 3D"라는 것을 알면서도 SI 회사에 취업하는 이유가 이런 이직을 하기 위해서인 경우도 많습니다. 매일 하는 일이 타사로 출근해서, 타사 사람들과 만나는 거니 이런 인맥/접점을 통해서 이직을 하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이직하는 당사자와 이직을 제안하는 회사 모두 만족할 수 있는 결과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직하는 개발자는 연봉이 올라가고, 이직을 제안한 회사는 바로 일을 시킬 수 있는 검증된, 맞춤형 인재이기 때문입니다. SI 개발 회사만 손해를 보게 되겠죠. 인력 잃고, 일도 잃고... 하지만 개발자로 일하는 내가 평생 한 회사만 다녀야 되는 것도 아니고, 이직을 함에 있어서 다니고 있는 회사까지 고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적은 연봉을 받으며, 잦은 야근과 늘 새로운 일들을 맡아서 처리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내 실력이 향상되었다면 당연히 나는 그만큼의 대우를 원할 수밖에 없고, 지금의 회사가 그런 대우를 해줄 수 없다면 다른 곳을 알아봐야 됩니다.
SI 업무를 6년 가까이 하면서 정말 영혼이 털리는 상황을 여러 차례 경험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돌아간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고, 이직을 하는 사람들도 당연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조건 SI를 나쁘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SI 회사를 평생 다닐 어떤 이유가 있지 않다면 늘 인력이 부족한 SI 회사에 취업을 해서 엄청 고생은 하겠지만 빠르게 배우고, 다양한 경력과 인맥을 쌓아서 더 좋은 조건의 회사로 갈 수 있는 좋은 발판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워낙 그 과정이 고생스럽다는 것을 여기저기에서 듣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저하는 게 사실이고, 충분히 그럴만합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런 시기를 잘 뚫고 나오면 그 이후부터는 내가 비전공이고, 나이가 많다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때는 엄청 많은 일들 중에서 내가 원하는 걸 골라서 지원하면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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